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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과 열반

얼마 전에 썼던 글에 대해서 성룡이가 트랙백을 걸었길래 여행 가기 전에 얼른 써본다.

  1. 소위 해탈과 열반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완전한 무소유, 즉 육체활동에 수반되는 최소한도의 영양분 역시 원치 않아야 한다(유여의열반)

    우리 생각보다 해탈한 사람, 즉 열반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많다.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은 내가 알기로 대승불교 쪽에서 주장한다고 안다. 죽지 않고선 해탈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죽음은 열반의 필요 조건이다. 그러나 선불교(禪佛敎)에서는 생불(生佛), 즉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을 인정한다. 한국 조계종(曹溪宗)의 법맥을 이은 선사들은 모두 생불이었다. 나도 열반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육체활동에 수반되는 최소한도의 영양분 역시 원치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첨언하자면, 인도 요기(yogi)들 중에선는 호흡을 극단적으로 조절하여 몇시간동안 한번의 날숨을 내뱉는 사람들도 있고, 실제로 식사를 하지 않고 지내는 자들도 있다. 실제로 이것이 가능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저런 것이 불가능해도 해탈은 가능하다.

  2. 행복은 말하자면 제로의 상태이지, 끝이 없는 양수 값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원하는 일을 성취해서 기쁘다. 그렇다면, 애초에 원하는 일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갈망하는 동안은 기쁜 상태인가? 만약 기쁜 상태라면, 성취했을 때 더 기쁜 이유는 무엇일까? 성취한 뒤의 기쁜 상태가 잔상이 사라지듯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사그러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완전 발전의 에너지가 마찰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처럼, 행복의 완전한 유지가 무엇에 의해 불가능하게 되는가? (정말 불가능한가?)

  3. 자기 발전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자기 발전을 원하는가?

  4. 우리가 인간이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가? 무엇이 우리 스스로 인간이여만 한다고, 인간성을 유지해야한다고 생각하게 하는가?

  5. 결정적으로 성룡이의 글은 해탈과 열반에 대해서 다른(틀린?) 이해를 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최소 조건들은 그들이 우리와 같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정말로 생불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성룡이가 원하는 인간의 조건들을 만족하지 못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그들은 이미 하나의 인간이다. 다만 조금 다른 상태의 인간일 뿐이다. 그것이 틀린 인간이가? 그것은 인간이 아닌가? 마지막 질문. 그들이(그리고 우리가) 꼭 인간일 필요 있는가?

내가 해탈과 열반을 믿는 결정적인 이유는 생불을 본 사람들의 인간적인 설명이 너무나 그럴 듯했기 때문이다. 나의 이상주의적인 태도도 한몫 했겠지만.

큰스님의 초기 미국 생활 시절, 큰스님을 직접 만난 철학자이자 한의사인 김용옥 선생의 회고담을 소개한다. 그 당시 김용옥은 하버드대 박사 반 학생이었는데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숭산 큰스님의 달마 토크를 듣고 느낀 바를 이렇게 피력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나의 식(識)의 작용 속에서 집적해왔던 객기(客氣)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한 인간의 수도를 통해 쌓아올린 경지는 말과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몸과 몸으로 전달될 뿐이다. 몸과 몸의 만남은 언어가 없는 것이기에 거짓이 끼여들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그가 해탈인이었음을 직감했다. 그의 얼굴 속에는 위압적인 석굴암의 부처님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 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땅꼬마가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몸의 해탈의 최상의 경지는 바로 어린애 마음이요, 어린애 얼굴이다. 동안(童顔)의 밝은 미소, 그 이상의 해탈, 그 이상의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현각(玄覺), 만행(萬行)·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This entry was posted on March 17, 2007 at 11:30 AM. You can follow any responses to this entry through the RSS 2.0 feed. Both comments and pings are currently closed.

10 Responses to “집착과 열반”

  1. 강성룡 Says:
    1. 성취한 다음의 기쁜 상태가 사라지는 이유는 우리의 관심사가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대상이 바뀌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행복이 유지되지 않는 이유도 같다.
    2. 해탈에 관한 관점은 내가 받아들인 건 무여의열반이고 네가 받아들인 건 유여의열반이라는 것으로 차이를 정리할 수 있겠다. 애초에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으니 그걸 논하는 건 무의미한 짓 같다. 무여의열반과 유여의열반은 서로 틀린(다른?) 가정이니까.

    그리고 내가 던진 물음이 겉돈 것 같아서 다시 정리하겠다.

    1. 무여의열반이든, 유여의열반이든 해탈한 사람이 해탈에 대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나? 그렇다면 그건 뭐에 대한 성취감을 느끼는 걸까? ‘해탈을 원했기 때문에’ 해탈하게 된 건데 해탈하면 그 모든 욕심이 사라지게 되니 해탈 역시 성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건 깨달음이지 해탈이 아니다.
    2. 고로 해탈이 행복의 수단이란 것은 잘못된 말이다.
    3. 자기 발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내 개인적인 호불호에 의해서였다(글을 다시 읽어보길). 해탈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해탈한다고 개인적 성취 외에 얻는 것이 없으므로 무의미하다고 꺼낸 말이지 해탈에 대한 반박을 하려고 꺼낸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이 글을 다시 적는 이유도 내 개인적인 호불호임을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이다.

    p.s

    생불이라고 추앙받는 사람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그들이 생불인지 아닌지 판단기준이 모호하다(즉 해탈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의심스럽다). 사람들이 생불로 인정하는 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도 있다. 확실한 해탈 여부에 의해 생불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면 그건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또, 유여의열반 상태에서 그들이(그래, 백 보 양보해서 생명유지에 대한 갈망 정도는 한다 해도) 하는 행동을 볼 때 가장 납득이 안 되는 것은 대체 왜 저 먼 숲속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설법을 하며 돌아다닐까 하는 것이다. 결국 많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그들의 마음 역시 욕구 아닌가? 네팔의 봄존이라는 생불을 보면 그나마 생불에 가까와 보인다. 하지만 이 역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 떠도는 허언들이 너무 상업적이다(이외에 다른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2. 강성룡 Says:

    또, 인간이 왜 인간이 인간다워야 하냐면 더 나은 삶을 위해서이다. 세계는 (굳이 말하자면)해탈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동물이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아가는 곳이니까.

  3. Min-hee Hong (DAHLIA) Says:

    사실 이 글을 다시 적는 이유도 내 개인적인 호불호임을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이다.

    모든 주장은 기본적으로 호불호를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네가 말한 내용은 네 호불호일 뿐만 아니라, 네 생각이기도 하다. 난 이 주제에 대해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다.

    성취한 다음의 기쁜 상태가 사라지는 이유는 우리의 관심사가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대상이 바뀌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행복이 유지되지 않는 이유도 같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었다. 관심사가 애초에 없다면 행복의 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탈에 관한 관점은 내가 받아들인 건 무여의열반이고 네가 받아들인 건 유여의열반이라는 것으로 차이를 정리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유여의열반에 대한 관점도 얘기해 주었으면 한다.

    무여의열반이든, 유여의열반이든 해탈한 사람이 해탈에 대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나? 그렇다면 그건 뭐에 대한 성취감을 느끼는 걸까?

    해탈을 원하지 않아도 해탈은 할 수 있다. 해탈은 원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해탈은 성취감을 위한 상태가 아니다. 성취감이 없어도 기쁠 수 있는 상태가 열반이다.

    ‘해탈을 원했기 때문에’ 해탈하게 된 건데 해탈하면 그 모든 욕심이 사라지게 되니 해탈 역시 성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건 깨달음이지 해탈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탈을 원하지 않는다. 난 해탈을 원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열반은 욕구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그저 이상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해탈을 원하지 않지만, 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식의 이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해탈은 깨달음이라고도 한다.

    고로 해탈이 행복의 수단이란 것은 잘못된 말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해탈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여러 종류의 행복의 수단을 접하고, 그들 중 일부를 선택한다. 어떤 것은 불행의 길이라고 생각되는데 알고보니 행복의 길인 것들도 있다. 행복의 수단처럼 보이지만 행복의 수단이 아닌 것도 있다. 일반적으로 섹스의 느낌을 쾌락이라고 하지만 행복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섹스로 인한 쾌락은 섹스가 끝난 직후 바로 사그러들기 때문이다. 기쁜 상태가 길게 유지되지 못하면 우리는 그것을 쾌락이라고 부르며 안좋은 느낌을 가진다. 행복이 사그러든다는 것은 다시 괴로움(욕구)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내가 행복이 제로라고 했던 것은 그런 의미이다. 사실 집착, 욕구, 괴로움은 같은 말이다. 모두 행복의 부재를 의미한다. 다만 괴로움이 스칼라(scalar)인 반면, 집착과 괴로움은 방향성이 있는 일종의 벡터(vector)라는 것이 조금 다르다.

    생불이라고 추앙받는 사람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그들이 생불인지 아닌지 판단기준이 모호하다(즉 해탈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의심스럽다). 사람들이 생불로 인정하는 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도 있다. 확실한 해탈 여부에 의해 생불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면 그건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난 사실 생불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들이 생불이 아니라도 괜찮다고 본다. 그들이 생불이 아니라면 나를 불행하게 하는가?

    또, 유여의열반 상태에서 그들이(그래, 백 보 양보해서 생명유지에 대한 갈망 정도는 한다 해도) 하는 행동을 볼 때 가장 납득이 안 되는 것은 대체 왜 저 먼 숲속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설법을 하며 돌아다닐까 하는 것이다. 결국 많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그들의 마음 역시 욕구 아닌가? 네팔의 봄존이라는 생불을 보면 그나마 생불에 가까와 보인다. 하지만 이 역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 떠도는 허언들이 너무 상업적이다(이외에 다른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생불은 종종 설법을 한다. 난 그들의 행동이 욕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설법을 하기는 하지만, 중생을 구제하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지는 않는다(괴로움이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말의 안타까움이라도 그것은 분명한 괴로움이다).

    우리가 인간이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가? 무엇이 우리 스스로 인간이여만 한다고, 인간성을 유지해야한다고 생각하게 하는가?

    또, 인간이 왜 인간이 인간다워야 하냐면 더 나은 삶을 위해서이다. 세계는 (굳이 말하자면)해탈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동물이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아가는 곳이니까.

    네가 대답한 내용은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다. 왜냐면,

    1. 인간성의 기준이 모호한데다, (일단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집착 혹은 욕구하는 것으로 기준하자.)
    2. 네가 말하는 더 나은 삶이 이미 네가 생각하는 인간성의 충족을 말하기 때문이다.

    즉, 회귀 논리일 뿐이다. 더 나은 삶이 인간성의 충족을 말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왜 인간다워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몇가지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1. 불교 서적을 몇권 빌려줄테니 언어본능 빨리 내놔라. 그걸 읽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2. 나 또한 인간이고, 공동체에 기여하고 보다 큰 일을 해내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나는 그것을 괜찮게 본다. 하지만 그것을 궁극적인 삶의 목적으로 하겠냐고 하면 망설여진다. 네 말대로, 사람의 관심사는 바뀌기 때문이다.
  4. 강성룡 Says:

    해탈은 깨달음이라고도 한다

    해탈은 깨달음이지만 깨달음은 해탈이 아니다. 깨달음에 대해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저번에도 네가 몇번 말하곤 했던 어떤 스님의 예를 아직 난 기억하고 있다.

    해탈을 원하지 않아도 해탈은 할 수 있다. 해탈은 원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해탈은 성취감을 위한 상태가 아니다. 성취감이 없어도 기쁠 수 있는 상태가 열반이다.

    그렇다면 왜 일반인들 중에선(해탈을 전혀 원하지 않는) 해탈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까? 이건 순수한 궁금증. 해탈을 원해서 해탈하는 법을 알게 되고, 해탈하기 위해서 해탈을 비롯해 모든 것에의 욕구를 접는 순간 해탈한다는 말인가? 또,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해탈했고 행복하다고 자각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도 항상 기분이 좋으면 해탈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해탈한 자 역시 종종 파계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해탈 역시 행복론이라기보단 행복을 추구하는 수단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들이 파계하는 이유는 근본적인 무엇인가?

    생불은 종종 설법을 한다. 난 그들의 행동이 욕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설법을 하기는 하지만, 중생을 구제하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지는 않는다(괴로움이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말의 안타까움이라도 그것은 분명한 괴로움이다).

    네가 주장하는 생불은 내가 알고 있는 생불의 이미지와 매우 다른 것 같다.

    p.s 요즘 레포트 쓰느라 바쁘니까 좀 더 기다려주길.

  5. 강성룡 Says:

    해탈한 자 역시 종종 파계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해탈 역시 행복론이라기보단 행복을 추구하는 수단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들이 파계하는 이유는 근본적인 무엇인가?

    그렇다면 해탈 역시 행복론이라기보단 행복을 추구하는 수단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파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6. Min-hee Hong (DAHLIA) Says:

    해탈은 깨달음이라고도 한다

    해탈은 깨달음이지만 깨달음은 해탈이 아니다. 깨달음에 대해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저번에도 네가 몇번 말하곤 했던 어떤 스님의 예를 아직 난 기억하고 있다.

    네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내가 읽은 것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만공은 생각 끝에 천장사를 떠나기로 하고 온양에 있는 봉곡사로 거처를 옮겨 불철주야 정진에 들어갔다. 그렇게 두 해가 지난 어느 겨울밤, 면벽 정진하던 만공은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서쪽 벽을 바라보고 화주에 침잠하고 있던 만공은 나중에는 화두를 들고 있다는 생각조차 없는 상태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눈앞에 있던 서쪽 변이 사라지고 텅 빈 허공이 되는 것이었다. 벽이 마치 유리 같았다. 밖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보였다. 바위, 나무, 새, 구름이 보였다. 이서방이 절 뜰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김서방이 법당 안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약수를 먹고 있는 것도 보였다.

    “와…… 내가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구나!”

    그가 천장을 쳐다보았을 때 하늘에 떠가는 희구름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고 새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뒤를 돌아보니 소나무가 무성했다. 만공 스님은 마음속에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으로 방석을 박차고 나왔다.

    아마 이 부분일 것이다. 경허 선사께 법맥을 이어받은 만공 선사의 에피소드인데, 충만감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

    다음날 그는 절의 큰스님을 방문했다.

    “제가 드디어 본성을 깨달았습니다.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오, 그래. 그럼 질문을 하겠다. 우주의 본질이 무엇이더냐?”

    “지붕과 벽을 보니 아무것도 없군요.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만공 스님은 자신있게 말했다.

    “저는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습니다, 하하하.”

    그런데 이때, 갑자기 선사가 막대기로 그의 머리를 때렸다.

    “악.”

    “이제 걸림 없는 것은 어디 있느냐?”

    만공이 움칠했다. 눈은 부풀고 얼굴이 붉어지고 벽이 다시 굳어졌다. 경허선사가 웃었다.

    “지금 진리는 어디 있느냐?”

    만공은 풀이 죽었다.

    “모르겠습니다. 좀 가르쳐 주십시오.”

    어쨌든 해탈한 것이 아니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일반인들 중에선(해탈을 전혀 원하지 않는) 해탈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까? 이건 순수한 궁금증. 해탈을 원해서 해탈하는 법을 알게 되고, 해탈하기 위해서 해탈을 비롯해 모든 것에의 욕구를 접는 순간 해탈한다는 말인가?

    있다. 불교 서적에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찾아서 읽어봐라. 생불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일반인들 말고 중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또,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해탈했고 행복하다고 자각할 수 있는가?

    자각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부분은 나도 모르겠다. 내 예상이지만, 정신의 모드(mode)가 바뀌듯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에 자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도 항상 기분이 좋으면 해탈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식으로 죽을 때까지 어떠한 괴로움이 없다면 해탈과 다를게 무엇이겠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생불이 정말로 생불인지 어떻게 판단할까? 불교에서는 법맥(法脈)이라는 것이 있다. 이 법맥은 생불에서 생불로 이어진다. 그럼 생불끼리는 생불을 판단할 수 있는 제3의 눈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스타워즈 제다이처럼 정말 멋있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선(禪)의 경우 우리가 보통 선문답이라고 하는 공안(公案)을 통해 일종의 테스트를 한다(공안에는 언어적 답이 없다고 한다). 사실 애초에 마하가섭이 염화미소(拈華微笑)로 석가로부터 법맥을 이었던 것부터가 하나의 테스트가 아닌가?

    난 아마추어 측에도 끼지 못하는 찌질이 불교론자(?)이다. 하지만 불가의 텍스트에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꼭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7. Dote Endarson Says:

    흐..저는 기독교인지라….하지만 문학적 분석(?)이라면 읽어도 되는건가…

  8. 몽상쟁이 Says:

    재미있는 이야기네. 잘 읽었다. ㅋㅋ 다만,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면 좀 더 찾아서 읽어봐. 어쩌면 이런 논쟁 아닌 논쟁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을테니까. 불교 경전이라는 게 알다시피 기독교처럼 성경(Bible)이라는 절대적인 책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형식도 지극히 보수적인 것부터 진보적인 것까지 다양하게 아우르고 있어. 난 솔직히 외국 승려들이 금강경이 아니라 다른 서적을 읽었을 때에도 과연 머리를 밀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뭐, 어차피 시간이 가져다 줄 답을 내가 쓸데없이 추근댄 것 같긴 하지만… 이런 논의를 하는 것도 괴로우면서 즐거운 일이지 안 그래?

  9. Dote Endarson Says:

    아예 정리를 해 버리시는 군요. 동의 합니다.

  10. Min-hee Hong (DAHLIA) Says:

    불교 경전이라는 게 알다시피 기독교처럼 성경(Bible)이라는 절대적인 책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형식도 지극히 보수적인 것부터 진보적인 것까지 다양하게 아우르고 있어.

    사실 저는 불교보다는 보리달마 이후의 선(禪)에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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